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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잘못이 아니야’ 우리는 연결될수록 강하다

[한겨레] [문샘과 함께 자기방어훈련]



반(反)성폭력 운동의 길고 긴 역사 속에서 떠오른 질문 하나. 피해자는 완벽하게 무력한 존재인가? 그에 대한 응답이 여성주의 자기방어훈련이다. 사회는 피해자가 무기력한 존재이기를 강요한다. 그것은 가해자가 예상하고 기대하는 것이기도 하다.

약한 몸과 조신한 행동거지를 갖되, 행여 성폭력이 일어나면 가해자가 다치지 않을 만큼 그러나 격렬하게 저항해야 하고, 그 이후에는 수치심에 눈물 흘리며 조용히 살아야 한다는, 그 누구도 받아들일 수 없는 네모난 무기력 상자에 가두려 한다. 그러다보니 정말로 무력감을 느끼는 일도 많다.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당하고 있을 때, 완전히 혼자라는 기분을 떨치기 힘들다. 가해자는 물리적으로 혼자 있는 시간과 공간을 노리기도 하고, 적극적으로 고립되도록 통제하기도 한다. 분명히 가까운 곳에 사람들이 있고 목격자가 있는데, 없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잠든 나를 더듬는 손길을 감지했을 때, “아유 많이 컸네. 여자가 다 되었어”라며 등허리나 엉덩이를 만지는 친척 어른 앞에서, “소지품 검사를 하다가 속옷이 나오면 흥분되겠지”라고 말하는 선생님 앞에서, 성폭행 피해 사실을 털어놓으니 내 온몸을 다시 훑어보는 시선 앞에서 철저하게 고립되고 혼자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거기엔 항상 사람이 있다. 얼어붙어 버려서 아무 말도 못 할 때, 대신 “차별하는 건가요?” 소리쳐 준 친구,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하고 끝까지 들어주는 사람들, 단체 대화방에서 오고간 대화의 폭력성을 알려주는 친구들, 112에 전화를 걸어주는 사람들, “이건 우리의 문제니까 함께 해결하자”고 말하는 사람들, 여성긴급전화 1366에 전화를 걸면 증거를 채취할 수 있는 병원을 알려준다고 일러주는 사람들. 증거 사진을 찍고 기록을 만들어두자고 하는 사람들. 몸과 마음을 치료하고 경찰에 신고하도록 도와주는 쉼터가 있고, 여성단체가 있고 아동청소년상담기관이 있다. 

목격자가 있었지만 그들이 침묵하거나 폭력을 부추긴 일이 있었을 수도 있다. 친구, 가족, 교사, 관련 기관에 도움을 청했지만 오히려 나를 비난하는 경험을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아직 끝나지 않았다. 미투 운동을 보라.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고, 그것은 가해자의 잘못이며 사회가 비뚤어진 것이라고, 그러니 이제라도 새로이 바꾸어 나가자고, 폭력을 중단하라고 소리치는 운동이다. 거리로 나오고 댓글을 단다. 나의 경험을 말하고 당신의 경험을 듣는다. 뛰고, 잡고, 땀 흘리고, 몸 쓰는 것을 응원한다. 자기 주장을 펼치는 청소년의 말을 경청한다. 그런 사람들과 연결돼야 하고, 그들이 나에게 연결될 수 있도록 나를 드러내야 한다. 


그날이 떠오른다. 그때 마주했던 두려움과 분노. 이내 마음의 균형을 잡는다. 내 잘못이 아니야! 호흡에 집중한다. 느리고 깊은 호흡. 이제 새로운 역사를 쓴다. 주변에 무엇이 있었던가. 누가 내 옆에 서 줄 수 있었을까. 지금은 무엇을 해볼 수 있을까. 누구와 이야기하면 좋을까. 주위를 둘러보면 ‘네 잘못이 아니야’, ‘지금부터는 다르게 할 수 있어’라고 말해줄 누군가가, 함께 바로잡아 나가자고 손을 내밀 누군가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혼자가 아니다. “우리는 연결될수록 강하다.”

문미정(여성주의 자기방어훈련 강사, <소녀, 설치고 말하고 생각하라>(우리학교) 지은이(공저))

※ ‘문샘과 함께 ‘자기방어훈련’’ 연재를 마칩니다. 문미정 선생님과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